소설/그림자 소년

그림자 소년 31화 [각자의 길 7]

kaether 2023. 8. 1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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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년 31화 [각자의 길 7]


한편 일행들이 수도로 왔다는 소식은 비형랑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 녀석들이 제 발로 찾아 왔단 말이지?”
{예 대장! 녀석들이 비보 사찰로 들어 가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애써 찾으러 다니는 수고를 덜었으니 차라리 잘됐구나”
“그럼 바로 진행할까요?”

 

비형랑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은 놔두거라. 어차피 한양에 들어 온 이상 녀석들은 우리 손아귀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일이 먼저니. 일단은 녀석들이 뭘 하려 이곳에 왔는지만 내게 보고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요괴가 사라지자 이제 자리에는 길달 만이 남아 있었다.

 

“대장! 그럼… 그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슬슬 몸이 근질근질 한가 보군”

 

길달은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그 녀석이 딴 맘을 먹는다면 저희에 대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 상황에서 녀석이 날뛰게 된다면 더더욱..”
“어차피 녀석이 수도에서 날뛰게 되는 것 또한 우리 계획이지 않느냐. 일단은 거사가 있기 전까지 녀석이 조정에 발각되지 않도록 거처를 마련해주도록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비보 사찰을 바라보는 노승은 회환에 잠겨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

노승의 기억속에 주지 스님은 인자하고 자비로웠던 분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주지스님은 노승에게 있어 아직까지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음을 비우거라!”

 

-탁-

 

졸고 있는 어린 동자승의 어깨에 죽비 소리가 명쾌하게 울려 펴졌다.

화들짝 놀란 동자승은 제 빨리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이어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동자승들의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동자승은 부끄러운지 다른 동자승들을 노려 보았다.

 

-탁-

 

그때 주지 스님의 죽비 소리가 사찰 안에 다시 한번 울려 펴지자 웃고 잇던 동자승들도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늦은 겨울 밤. 동자승은 잠에서 깨어 뒷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종종 걸음으로 뒷간을 향하던 동자승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주지 스님을 발견하였다. 주지 스님의 어깨 자락에는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듯. 그의 어깨에는 하얀 겨울눈이 소복히 내려 앉아 있었다.

 

동자승은 주지 스님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주지 스님? 이 시간에 안 주무시고 뭐하시지…”

 

그때 였다. 인기척을 느낀 주지 스님이 동자승을 불렀다.

 

“성철이냐!”

 

주지 스님의 물음에 어린 시절 노승은 조심스레 답했다.

 

“예~ 스님…”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하는게냐”
“아.. 그..그것이 뒷간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잠도 안 오고…”
“근심이 있는 것이냐…”

 

주지스님의 말에 어린 성철은 솔직히 답하였다.

 

“예 그것이 조금… 마음이 복잡합니다…”
“흠… 그것도 다 하나의 과정이니 너무 개의치 말거라!”

어린 성철은 평소 번뇌를 떨쳐 내라 말씀하시던 주지 스님의 말에 혼이 날까 걱정하였다. 그렇지만 돌아온 주지스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오늘은 혼내시지 않는 것입니까? 스님”

 

그러자 주지 스님이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허허 혼내긴… 언제 내가 혼냈다고 그러느냐!”
“아…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다!”

 

둘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어린 성철이었다.

 

“혹시 스님께서도 근심이 있으십니까?”
“근심이라… 성철이 너는 근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마음속의 번뇌 아닙니까?”
“번뇌라.. 그것도 맞지! 인생이라는 것은 근심의 연속이니까.”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그 번뇌를 어떻게 떨쳐내셨습니까?”
“성철아 번뇌를 떨쳐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렇지만 스님께서는 번뇌를 떨쳐내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번뇌를 떨쳐 냈다고 누가 그러더냐? 근본적으로 번뇌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집착에서 나오는 마음에 갈등 이니라… 그러니 그것 또한 내 몸과도 같은 것이다. 하물며 한낱 중생에 불과한 나라고 어찌 다르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떨쳐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린 성철의 물음에 주지 스님은 겨울 밤.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잠 못 이루는 삼경(三更) 밤에
근심은 찬 비 따라 생겨나네
내일 아침 이내 귀밑머리엔
흰 눈이 몇 가닥 더 내릴까

 

정수강(丁壽崗, 1454~1527), 『월헌집(月軒集)』 1권 「한겨울 밤에 빗소리를 듣다[仲冬夜聞雨聲]」


“무슨 뜻 인줄 알겠느냐?”

 

주지 스님의 물음에 어린 성철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

 

그러자 주지 스님은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나도 근심이 있단다. 살아보니 그동안 무지했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앞으로 살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세월에 대한 아쉬움. 어느새 부터 미래의 일보다는 과거의 추억만이 남게 되는 하루 하루 살다 보니, 이제는 내가 나이를 더 먹어 가는 것도 덧없이 느껴지는구나! 하지만… 이제 이 세상을 등지게 된다는 것은 여전히 두렵구나…”

 

자비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주지 스님. 어린 성철은 그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날 따라 겨울 밤에 내리는 비는 주지 스님의 어깨를 흥건히 적시었다. 주지 스님의 씁쓸한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 성철 또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시 어린 노승은 알지 못했다. 이것이 생전 주지 스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란 걸 말이다.

 

다음날 비보 사찰안에는 곡성이 울려 펴지며 주지 스님의 장례가 이루어 졌다.

절 밖으로 퍼져나가는 불경 소리와 함께 그를 따르던 어린 동자승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모두 떠나간 주지 스님을 기리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린 성철이 어느덧 18세가 되던 해.

 

“가는 것이냐!”

 

큰스님이 젊은 시절 성철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후회는 없겠느냐?”
“예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이 넓은 세상을 두고 이 절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예전에 주지 스님께서도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번뇌를 떨쳐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 떨쳐내는 과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요… 저는 그날 자비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시던 주지 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자애롭고 현명하셨던 주지 스님마저도 죽음은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죽기 전에 이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너의 의사가 이렇게 완강하니.. 부디 그 뜻을 이루길 기원하마!”

 

#
젊은 시절 노승은 그날 절을 나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승은 다시 승려가 되어 전국을 돌아 다니며 늙은 노승의 모습으로 다시 이 곳으로 발을 디뎠다.

 

‘오랜 만이구나… 다들 잘 계신 것일까…’

 

 

절 안으로 들어오자 노승에게 자애로운 미소로 합장하는 노승이 다가왔다. 노승 역시 합장으로 인사를 건넸다. 곧이어 비보 사찰의 큰스님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저도 오랜만 입니다. 스님! 아니 이제 큰스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노승은 다른 노승에게 큰스님이라 칭하며 말을 이었다.

 

“큰 스님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그냥 편하게 부르시지요… 같은 스승 밑에서 자란 동기이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은 과거 노승의 어린 시절. 같은 주지 스님의 가름침을 받고 자란 동자승 들이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호기심이 가득했던 어린 동자승들은 세월이 흘러 이렇게 어엿한 스님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큰스님은 일행들을 안으로 들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절 안으로 들어오자 큰 스님과 노승은 그간 못 다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성철 스님께서 나가시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소식은 얼핏 전해 들었습니다…”

 

노승이 말하자 이내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그날이 있고 얼마 안 가서 전쟁이 일어 났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랬었지요…”
“이제는 주지 스님도 다른 스님들도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 우리 둘만 이렇게 남게 되니... 세월의 무서움이 실감이 나는군요”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라도 다시 인연을 만나게 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큰스님의 물음에 노승은 허심탄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잘 지냈지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상도 돌아보고 온갖 진귀한 음식도 먹어보고 결국에는 이렇게 다시 돌아 왔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럼요!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다 좋은 기억 들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만나게 되면 성철 스님께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말입니까? 그러시죠”
“기억나십니까? 어린 시절 우리가 주지 스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던 시절을요! 저는 아직도 그날의 주지 스님의 가르침이 생생합니다.”
“아 그럼요 그럼요 기억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부끄럽게도 저는 아직 마음속의 번뇌를 떨쳐내지 못한 듯 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떠십니까?”
“큰 스님께서도 아직 떨쳐내지 못한 번뇌를 저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그냥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주지 스님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한 소리 하셨을 텐데 그립습니다…”
“하하하 그러셨겠죠 주지 스님이시라면 이런 저희를 보고 노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노승과 큰스님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한참 동안이나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노승은 주지 스님의 생전 마지막 말 만은 차마 큰스님에게 말하지 못하였다.

 

‘주지 스님께서도 마지막 까지 죽음이란 번뇌를 떨치시지 못 하셨는데… 우리라고 다를 것이 있겠나… 참으로 인생이란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구나…’